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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솔미디어
지금의 기록으로 기억의 단편이나마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승단심사날

구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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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꿈꿔오던 태권도장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태극기가 눈에 띄었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부드러움에 놀라 바라본 바닥은 시리도록 찬란한 연녹색이었다.

애당초 자격증 취득이 목적이었고 운동이 하고싶어 찾은 곳은 아니었기에 약간은 불편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관장님께 다시 전화를 걸어 등록을 마친 뒤, 그 날로 바로 운동하러 나갔다. 도복이 준비되지 않아 사복을 입은 채 병아리같은 꼬마애들과 발차기를 했다.
나이먹은 아저씨(아저씨라고들 부르더군 ㅡ.,ㅡ)가 한 발 한 발 힘차게 내뻗을 때마다 녀석들은 신기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간혹 의아하거나 이해가 가지않는다는 표정으로 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파란 띠부터 시작해서 빨간 띠로 올라가는 동안 점차적으로 태권도에 매력을 느껴갔다.
파란띠를 처음 매고 한동안 관장님의 지도를 받을 때 갖게된 느낌은 "태권도는 멋을 중시하는구나"였다.
단신이신 관장님은 시범을 보이실 때 놀라울 정도의 빠른 몸놀림으로 나의 턱밑(거의 1mm정도는 앞까지 오지않았나 싶다.)까지 발을 뻗으셨고, 그 뒤엔 발을 천천히 접으시면서 기합과 균형, 다리 힘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조화되어야 멋있는 발차기가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도서관에 가서 발차기 사진과 원리를 보고 도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와서는 집 앞의 작은 마당에서 밤늦게까지 품새를 연습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은 2006년 4월 1일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결전의 6월 3일 승단심사 바로 직전까지 이어졌다.

솔직히 품새는 자신감이 제대로 충만했다.
1장부터 8장까지 심사장 가서도 혼자 빨간 띠 매고 애들 웃는데도 무릅쓰고 연습했고( 이 와중에 한 명의 동갑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동병상련이랄까.. 풋 )머리로 아는게 아니라 몸에 그냥 익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겨루기였다. 제대로 된 겨루기는 한 번도 못해봤기 때문이었다.
4시간은 기다렸을까. 시간은 흘러흘러 드디어 순서가 되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내려갔고 몇 장하게 될까 긴장감속에 기다리던 중..
1장 부터 3장은 안 시킨다고 하길래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데 3장을 시키는 것이었다.
기다리면서 연습을 하긴 했지만 상당히 느닷없어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워낙에 몸에 익어서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 줄도 모른채 팔다리를 휘둘러댔고 3장과 8장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대망의 겨루기..
심사위원들이 덩치 순대로 붙여주기 시작했고 난 일부러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으려해도 이상하게 위압감이 느껴져 살짝 고개를 돌린 순간 키가 한 185cm는 될 것같고 몸무게는 한 100kg가까이 나갈 것같은 듬직한 친구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는 것을 볼 수있었다.
심장이 훅하고 크게 뛰고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생성되었다. 나같이 왜소한 체격으론 상황이 약간 언밸런스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싶어(동생들도 심사를 마치고 구경하고 있으니) 마음을 다잡던 중 다시 심사위원이 나의 상대를 체격이 비슷한 외국인으로 바꿔 주었다.
아랍계열 쪽인 듯했고, 체격은 비슷했지만 상당히 다부져보이고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이 좋아서 긴장이 약간 풀어졌다. 겨루기는 커녕 헤드기어도 처음 써보는 상태인지라 정신이 없었지만 심사위원이 시작!을 외치자 마자 시력이 약간 좋아지는 듯 몸의 감각이 살아남을 느꼈고 커다란 기합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의 어딘가를 맞았다는 느낌과 함께 마치 사고를 당한 듯한 처절한 통증이 몸을 휘감았고 잠시 뒤 명치를 세게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숨도 쉴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이 무릎에 손을 얹고 반쯤 엎드린 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고 곧이어 나는 간신히 숨이 트이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외국인은 예의 사람좋아보이는 표정으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다. 나보다 약간 작았던 그는 더이상 작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맹수를 만난 것처럼 신중했고 경기내내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다 끝날 쯤에 그의 급소를 걷어찬 것 외엔 발 한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채 경기장을 내려왔다. 이제 감을 알겠다 싶던 그 순간. 종료를 알리는 심사위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나의 피는 끓었고 마음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시합이 끝난 뒤 외국인이 "미안해요" 라고 악수를 청하며 내 등을 두드리자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심사는 끝이 났다. 2층으로 올라오자 관장님이 "왜 멍하니 있어? 공격을 해야지." 하셨다. 나는 생뚱맞게도 "원래 그렇게 세게 때리나요?" 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관장님은 "그럼, 인정사정없는거지." 라고 짧게 답하셨고 우리는 입구까지 아무 말없이 걷다가 간단히 서로 인사한 뒤 헤어졌다.

열정이 확 올라올 무렵 겨루기는 끝이 났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빠른 몸놀림. 강한 발차기. 커다란 기합과 함성...
기회가 된다면이 아니라 반드시 꼭, 겨루기 시합에 나가보고 싶다.
약간은 우습게 보던 태권도, 왜 그렇게 여겼을까?
수련을 하면 할 수록 깊은 무게가 느껴진다.
검은 띠를 매니 실제로 허리가 무거워짐을 느꼈고, 그 결과 더 예리한 발차기를 할 수 있었다.

올해는 2단을 노려볼까 생각 중이다.
chodan.jpg (250.4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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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진 07.01.30 07:43:53 수정 답변 삭제
ㅋㅋ 재밌게 잘 읽었다. 그래서 그 날 승단이 된거냐 아님 낭중에 된 거냐? 멜 보냈으니 보렴
구솔 07.01.30 10:59:17 수정 답변 삭제
승단되었습니다.
바로는 아니고 2주일(쯤?)정도 뒤에 관장님께 여쭤보니 바로 국기원에 알아보시고 합격했다고 하시더군요.

아직도 가끔 그 외국인이 생각납니다.
특히 도장으로 가는 길에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 운동이 잘 됩니다. (그래서 가끔 관장님께 칭찬을 듣기도 하지요^^)
벌겋게 부어오른 정강이와 손목으로 잠시동안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2단 심사 땐 좀 더 강한 상대를 만날 지 모르는데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트래비스 08.03.07 06:30:48 수정 답변 삭제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태권도를 늦게 시작하셨네요...
그래도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시작하신것 대단하네요...
저도 열정은 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들 나이가 아닌것 같아서 ...ㅋㅋ
더욱 열심히 하세요...
혹시 4단되셔서 사범님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구솔 08.03.07 08:10:36 수정 답변 삭제
저도 말을 잘;;
정말 늦게, 그리고 본의 아니게 시작했는데 그 때가 잠깐이었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데도 다니기 힘드네요.
요새도 그런 마음은 여전합니다.
기회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게도, 트래비스 홍님에게도.
열정만 있다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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